언론보도

 

언론에 비친 주사랑공동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소식 >언론보도

[오마이뉴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 이들에겐 잔혹동화

Writer. 주사랑공동체   /   Data. 2026-07-08   /   48
[보이지 않는 아이들] 입양과 가정위탁제도가 활성화되지 못하는 구조적 이유
▲  아이들은 대부분 입양이나 가정위탁이 아니라, 보육시설로 가고 있었다
ⓒ 챗GPT

2021년 3월이었다. 베이비박스로 온 아이들중 유기 아동의 보호초지 경로를 추적하는 중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속절 없이 시설로 가고 있었다. 
출생정보가 전혀 없는 유기아동에게 입양과 가정위탁 제도가 멀쩡히 있는데 왜 입양부모나 위탁가정이 아닌 보육시설로 가는지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한 지역 가정위탁지원센터를 찾았다.
지자체로부터 가정위탁 사업을 수탁 받아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이었다. 사무실은 조용했다. 
담당자로부터 들을 수 있었던 내용은 위탁가정 모집 현황, 교육 관련 업무, 사례 관리 건수 등이었다. 
묻고 싶었던 건 일반위탁가정 발굴 사업에 대해서였다.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한정된 예산으로 교육하고 관리하는데도 벅차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도 규모가 제법 큰 법인의 업무생태계 안에서 순환근무라는 쳇바퀴를 돌아야 하는 직원들이었다. 
업무의 전문성을 갖추는 데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

위탁가정을 발굴하거나 지역 사회 안에서 인식을 개선하는 등의 새로운 사업을 펼치는 원대한 일은 여의치 않아 보였다. 
사회복지사인 그들은 각자 맡은 일을 성실히 하고 있었다. 문제는 구조였다.

가정위탁제도의 현실

2003년 가정위탁제도가 생겼을 때 그것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이미 어느 정도 예정돼 있었다. 
유교적 문화가 짙게 밴 한국사회에서 아이를 맡는다는 것은 대개 피를 나눈 가족의 일이었다. 아이가 부모를 잃으면 조부모나 친인척이 나섰다. 
그것도 없으면 시설이 받았다. 혈연과 시설 사이의 공백에 낯선 타인이 자리를 잡는 문화는 없었다.

이름은 가정위탁이었지만 절대적인 비중은 혈연이었다. 23년이 지난 지금도 구조는 같다. 
전체 위탁가정의 약 65%가 대리양육가정으로 부르는 조부모 위탁이다. 친인척까지 합치면 위탁가정 열에 아홉은 혈연 중심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낯선 어른이 부모 잃은 아이를 자기 집에 들이는 일은 제도가 허락한 뒤에도 좀처럼 늘지 않았다. 
비혈연 위탁가정은 2022년 기준 974가구다. 전체의 12.8%다. 2003년 353가구에서 시작해 22년 동안 세배가 됐다. 
그러나 같은 기간 전체 위탁가정은 2009년 이후 계속 줄었다.

분모가 작아지는 동안 비율이 커 보이는 착시다. 일반위탁이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 혈연위탁이 더 빠르게 줄어들었다. 
대리양육가정 즉 조부모의 고령화가 혈연위탁 가정의 모수를 줄였다. 그 빈자리를 일반위탁이 채워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사실상 국가는 위탁제도를 지방에 떠넘기고 방치했다.

가정위탁지원센터는 전국 시도에 설치됐다. 그러나 국가가 직접 운영하지 않는다. 중앙정부는 틀만 만들었다. 실행은 지자체의 몫이었다. 지방이양사업으로 분류된 이 사업은 다시 민간복지법인에 위탁됐다. 국가에서 지자체로, 지자체에서 민간법인으로. 부모로부터 양육이 포기된 아이를 가정에 연결하는 일을 국가는 책임을 분산시키고 방관했다.

민간법인이 이 사업을 수탁하면 대개 다음 해에도 같은 법인이 맡았다. 경쟁 없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오래 수탁한 기관이 전문성과 사업연속성을 쌓아야 하지만 현장은 달랐다. 그 기관 실무자는 순환근무로 교체된다. 전문성은 사람이 아니라 서류로만 남는다.

예산 구조는 이런 관행을 단단하게 만든다. 지자체가 법인에 내려보내는 사업비는 매년 비슷한 항목으로 채워진다. 
새로운 위탁가정을 발굴하거나 지역 사회와의 연계를 넓히는 시도는 제한된다. 관행이 예산을 만들고 예산이 관행을 공고화했다.

각자는 정해진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 최선들이 모인 자리에 가정위탁을 활성화시킬 힘은 없었다. 
예산이 없고 권한도 제한적이고 인력은 순환된다. 23년 동안 제도가 활성화되지 못한 이유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설계의 문제였다.

의지의 문제 아니라 설계의 문제

▲  베이비박스로 온 아이들은 왜 속절없이 시설로 가야 했을까
ⓒ omarlopez1 on Unsplash

지방이양사업 구조는 또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위탁가정 매칭이 행정구역 안에서만 이루어졌다. 
A시에 보호가 필요한 아이가 있고 B시에 적합한 위탁가정이 있어도 관할이 다르면 연결이 되지 못했다. 
같은 나라 안에서 서류가 통하지 않았다. 지자체가 다르다는 이유로 행정은 물론이고 예산 문제는 더욱이나 오갈 수 있는 길이 겹겹으로 막혀 있었다.

학대 피해를 입었거나 장애가 있거나, 영아보호를 위한 전문위탁이 필요한 경우 전국 매칭 실패율이 1/3에 달했다. 위탁가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지자체와 지자체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국경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너머로 아이를 받을 수 있는 위탁가정이 있어도 아이를 건네 주지 못했다.

2021년 봄, 베이비박스로 온 아이들이 속절없이 시설로 떠넘겨지던 이유를 추적했을 때 마주한 구조가 이것이었다. 
매뉴얼에 있는 보호전달체계는 작동되지 않았고 일시보호소는 일상적인 정원초과 상태였으며 일반위탁가정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 부족을 메울 방법이 제도 안에 없었다. 아이에게 허락된 길은 시설로 향하는 일방통행이었다.

일반위탁가정에 국가가 제공한 것은 월 34만 원에서 56만 원 내의 권고 양육보조금이었다. 법적 강제가 아닌 권고다. 
이마저도 지자체마다 달랐고 양육비로는 턱없이 부족해서 위탁부모 돈이 더 얹어져야 아이를 먹이고 입힐 수 있었다.

2025년 10월 이전까지 위탁부모는 법적으로 아이의 보호자가 아니었다. 아이가 다쳐 수술이 필요해도 연락이 끊긴 친부모를 찾아야 했다. 
책임은 위탁부모에게 있었지만 보호권한은 없었다. 그런 괴이한 상태가 제도 시행부터 22년 동안 이어졌다.

그럼에도 비혈연 일반위탁가정은 있었다. 선뜻 아이를 맡겠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의미다. 그 사람들이 버틸 수 있었던 건 국가가 만든 제도 덕분이 아니었다. 
그저 부모가 없거나 있어도 없는 것과 같은 아이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었다. 국가는 그런 그들의 선의에 아이를 맡기고 구조를 방치했다.

선의는 제도를 대신할 수 없다. 제도가 선의에 기댈 때 선의가 고갈되면 제도는 이름만 남는다. 
2025년 제 3차 아동정책 기본계획으로 가정위탁이 국가사업으로 전환된다고 발표됐다. 같은해 10월 위탁부모에게 일부 법정대리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2021년 봄 그 조용했던 사무실에서 목격한 것들 중에 아직 바뀌지 않은 것들이 있다. 
이중 위탁구조, 예산 관행, 순환 근무, 행정 칸막이.

주목할 만한 통계

해외 사례를 들여다보면 위탁제도가 만능이 아니라는 사실도 함께 보인다. 미국에서는 교도소 수감자의 약 20%가 위탁가정 출신이라는 통계가 있다. 
영국에서는 위탁보호 경험자의 유죄 판결 가능성이 일반 인구의 네 배에 이른다는 조사도 있다. 이 숫자만 떼어놓고 보면 위탁제도 자체에 구조적 결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같은 나라의 다른 연구는 정반대를 가리킨다. 미국 미시간주에서 진행된 한 인과관계 연구는 비슷한 위기 환경에 있던 아동을 
무작위에 가까운 조건으로 위탁과 친가정 잔류로 나누어 추적했다. 결과는 위탁에 들어간 아이들의 체포율이 친가정에 남은 아이들보다 오히려 낮았다. 
위탁보호가 범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제대로 작동하는 위탁보호가 범죄를 막고 있었다.

두 통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위탁보호 출신이라는 한 줄로 묶인 아이들 안에는 안정된 위탁가정에서 자란 아이와
몇 번이고 위탁가정을 옮겨 다닌 아이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배치가 불안정할수록, 시설형 그룹홈에 가까울수록 결과는 나빠졌다.

반면, 가정에 가까울수록 한 곳에 오래 머물수록 결과는 좋아졌다. 범죄 통계는 위탁제도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안정성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자료였다. 
위탁보호의 부정적 통계는 제도를 버릴 이유가 아니었다. 제도를 제대로 만들어야 할 이유였다.

이 지점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아동에게 가장 안정적인 보호 형태는 입양이다. 영구적인 가족관계, 법적 지위의 명확함, 평생에 걸친 소속감은 위탁이 줄 수 없는 성질이다.

그러나 모든 아이가 입양 대상이 되지 않는다. 친권이 살아 있고 입양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나 친권이 정리되지 않은 채 보호가 시작된 아이는 입양대상에서 제외된다. 
입양의사를 밝히지 않는 친부모가 있는 아이도 입양은 선택지가 아니다. 이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시설 아니면 위탁이다.

결국 위탁은 입양이 불가능한 경우 선택할 수 있는 차선의 보호방식이다. 그렇지만 시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한 명의 보호자, 한 곳의 집, 일관된 일상. 아동복지시설의 평균 재원 기간이 10년을 넘는 한국의 현실에서 그 10년을 집단시설과 하나의 가정 중 어디에서 보내느냐는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다.

미국과 영국의 사례가 말해주는 것은 위탁제도를 포기할 이유가 아니라 제대로 설계해야 할 이유다. 두 나라 모두 위탁부모를 전문적으로 양성하고, 
배치 안정성을 국가 단위로 추적하고 실비에 가까운 보상을 제공한다. 국가가 나서서 시설보호율을 낮추었다.

한국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

▲  서울시 관악구 난곡동 언덕길 꼭대기에 있는 베이비박스의 모습
ⓒ 김지영

한국에 남은 과제는 선명하다. 친권 문제로 입양될 수 없는 아이들, 입양 의사가 없는 아이들이 시설이 아닌 가정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현장에서 쏟아졌던 경고를 무시하고 강행한 2012년 입양특례법 시행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베이비박스 유기아동을 주목해야 한다. 
2012년부터 2024년 보호출산법 시행 전까지, 베이비박스를 통해 들어온 2000여 명의 아이들 중 1500여 명이 
법이 보장한 일시보호기간과 행정이 정한 보호조치 과정에서 배제된 채 시설로 이송됐다.

명백한 입양대상 아동이어야 할 아이들이 위탁가정 문턱조차 밟지 못하고 집단시설에서 자라 유소년기를 거쳐 청소년이 되었다. 
부모로부터 돌봄이 포기된 이 아이들에게 새로운 부모와 가정을 찾아주어야 할 의무가 국가와 지자체에 있었다. 
하지만 국가와 지자체는 이를 방기했고 이에 대한 어떤 책임 있는 말도, 유감표명이나 사과 한마디도 지금까지 없다. 
훗날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내밀게 될 청구서는 미래세대의 몫으로 남았다.

보호아동 발생은 인류문화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늘 우리 주위에서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날 비극이다. 
문명의 척도는 그 아이들을 대하는 국가의 태도다. 
인류는 오래 전부터 그 대안으로 보호아동의 가정보호를 최상의 가치로 삼았고 그걸 헤이그협약과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담았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떠안아야 할 과제다. 2025년 한국에서 발생한 보호아동 수는 2289명이었다. 
같은 해 시설보호율은 약 58%로(2022년 일시보호 별도 분류 이전 기준) 가정보호율을 앞섰다. 
위탁가정은 혈연중심이 6617가구인 반면 비혈연 위탁가정은 영유아 전문위탁가정을 포함하여 974가구에 그쳤다. 
23년 전인 2003년, 가정위탁제도 시행 첫 해 위탁가정 수는 353가구였다.

국가와 지자체가 문명사회의 가치이자 국제협약의 근본 이념인 보호아동의 가정보호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걸 증명하는 수치다.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중앙정부와 지자체는 여전히 시설로 응답하고 있다. 
표를 쥔 어른들의 요구에는 그토록 신속하게 반응하는 국가가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부모 없는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이런 식이다. 
어른이라는 말, 부모라는 말이 참으로 부끄러운 사회다.
목록
이전글/다음글
이전글 [부산일보] [인터뷰]“부산의 저출생·수도권 집중 문제, 취재하고 싶어”
다음글 다음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