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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중앙시평] 영·유아 인권 보호는 ‘익명 출산제’와 같이 가야

Writer. 주사랑공동체   /   Data. 2023-08-11   /   Hit. 1951
이은경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

감사원 감사로 드러난 ‘사라진 아기 2236명’ 사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영·유아 인권의 수준이 처참하리만큼 낮고,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여기는 경향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반성이 봇물 터지듯 나왔다. 이번 기회에 영·유아 인권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론의 강한 지지를 받았고, 정치권이 주도한 ‘두 가닥 법 개정’이 급물살을 탔다.

 
형사제재·출생통보 투 트랙 대책
정치권 만능키인 처벌과 규제뿐
위기의 여성과 태아 지키기 위해
보호출산법 시급하게 처리해야


첫째, 영아살해 및 유기에 관한 형사제재를 강화했다. 국회는 7월 18일 본회의를 열어 1953년 제정 이후 한 번도 손보지 않았던 영아살해 및 유기죄를 폐지했다. 과거엔 직계존속이 ‘치욕을 은폐하기 위하거나 양육할 수 없음을 예상하거나 특히 참작할만한 동기’로 인하여 분만 중 또는 분만 직후의 영아를 살해하거나 영아를 유기한 경우엔 일반 살인과 유기죄보다 형량을 대폭 감경했다. 직계존속의 입장만 고려할 뿐 영아 인권엔 너무 소홀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갓난아기 목숨을 성인보다 가벼이 여겨온 이런 과거 관행에 강한 제동이 걸렸다.

둘째, 병원에서 출생한 모든 아기에 대한 출생통보제를 도입했다. 의료기관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출생정보를 제출하면 심평원이 지체 없이 지방자치단체에 통보하는 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이 지난 6월 30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는 부모의 ‘출생신고’와 병원의 ‘출생통보’를 비교해 미등록 아기를 찾아내는 개념이다. 국가기관이 직접 영·유아의 현황을 확인하고 관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갓난아기의 처참한 희생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건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다. 영·유아는 너무 오래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다만, 한가지 문제점이 있다. 근친상간, 강간, 간통, 불법체류 등으로 인한 임신과 청소년 등의 혼전 출산은 여성 홀로 책임을 떠안는 경우가 적지 않고, 출생신고도 대부분 회피하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영아 살해나 유기 사건의 가장 많은 이유도 ‘출산 사실이 알려지는 게 두렵다’는 것 아닌가. 결국 갈등 상황에 처한 임산부에게 ‘낙태’만이 유일한 선택지라는 인식을 주입하거나, 화장실·모텔·야산 등 병원 밖 ‘나 홀로 출산’을 강요할 수 있다. 2012년 8월 ‘산모의 출생신고’를 입양요건으로 추가한 입양특례법 시행 후 베이비박스 아동이 갑자기 세 배 이상 증가한 전례에서 보듯이, 사라진 아기 대책으로 내놓은 형사제재와 출생통보라는 투 트랙이 오히려 공공연한 낙태를 조장하고, 영아 살해 및 은닉과 은밀한 영·유아 거래까지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이 많다.

정치권이 근본적 해결책보다 처벌과 규제라는 손쉬운 카드부터 만지작거리는 건 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법의 의도가 좋다고 결과까지 좋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규범과 현실의 괴리를 놓치기 쉽고,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임신과 출생을 밝히기 어려운 위기 여성의 숨통을 틔워주고, 궁지에 몰린 뱃속 태아와 영·유아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고민해야 한다.

당장 시급히 논의할 대안은 ‘익명 출산제’ 도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다. 심리적 억압 상태의 임산부를 위해 익명 출산을 법으로 보장하고, 출생신고 및 입양신청에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법안이다. 찬성 여론도 70%를 넘고 있고, 참고할 만한 입법례도 많다. ‘아기 모세법’으로 불리는 미국의 ‘영아 피난제’, 프랑스의 ‘익명 출산제’나 독일의 ‘신뢰 출산제’ 모두 출산 과정에서 산모의 익명성을 철저하게 보장한다. 다만 훗날 아이로부터 부모의 정보를 요청받을 경우 ‘친모의 권리’에 비중이 두는 프랑스는 친모의 동의를 요구하지만, ‘자녀의 알 권리’를 중요시하는 독일은 친모의 비공개 요청권만 인정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익명 출산제’를 도입을 위한 보호출산에 관한 특별법이 2020년 12월 발의 후 2년 7개월 동안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있다. 생모의 양육 포기 조장, 아동의 알 권리 침해 등의 이유로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호출산 후라도 상담 과정을 통해 직접 양육을 유도할 수 있고, 산모도 얼마든지 보호출산을 철회할 수 있다. 생모 및 생부에 관한 인적사항을 포함한 다양한 정보를 밀봉해 보관한 후, 훗날 아동의 정보공개청구권을 인정해 주는 방안도 있다. 무엇보다 알 권리나 양육의무 이전에 아동의 생명과 건강부터 보호해야 하지 않나. 보호출산법에 관한 찬반 논쟁이 지나치게 교조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지금은 가장 연약한 사회적 약자 중 하나인 영·유아 인권 보호에 힘과 지혜를 모을 때다. 아무런 항거도 못 하는 갓난아기의 희생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그러나, 홀로 아이를 양육할 수 없는 임계 상황의 여성에게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성이 있다. 망외의 임신, 사회적 편견, 경제적 궁핍 속에서 출산과 양육을 두려워하는 임산부들에게 보호출산법으로 희망의 문을 열어주고, 낙태 없이 출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이은경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

 

출처 : 중앙일보

원본 : 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3300095?sid=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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