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박스는 아기 살리는 곳"…이종락 주사랑공동체 교회 목사
편집자 주=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이종락 목사의 [삶] 인터뷰는 두 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이번 첫 번째 인터뷰 기사는 인생 스토리와 경험담 중심이고, 조만간 두 번째 인터뷰 기사가 정책적 분야에 초점을 맞출 예정입니다.
[촬영 이건희](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수업 중에 진통이 와서 학교 근처 산에 올라가 아기를 낳고는 땅에 묻으려 했던 여중생. 제주에서 배 타고 인천에 도착한 뒤 서울 베이비박스로 16시간 걸려 아기를 데려온 온 소녀. 베이비 박스가 없다면 이런 아기들은 지금 살아 있을까요?"
이종락(69) 주사랑공동체교회 담임목사는 지난 2009년 베이비박스를 만들고 지금까지 운영해온 사람이다.
지난 3일 서울 관악구 난곡로 베이비박스 사무실에서 이 목사를 만났다.
이 목사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베이비박스는 사람을 죽이는 곳이 아니라 살리는 곳"이라면서 "생명을 살리는데 불법, 합법 어쩌고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생명을 살리는 데 집중하는 그는 젊은 시절에는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았다.
학교 다니기 싫다며 고교를 중퇴했고, 술을 안 마시는 날이 거의 없었다. 입이 거칠었으며, 노는데 집중했다. 농촌에 살면서 모를 심어본 적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버릇을 고치겠다면서 멍석말이할 정도였다.
그런 그는 1987년 아들 은만 씨가 중증 장애아로 태어나고,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완전히 다른 삶을 시작했다.
자신의 전신마비 아들 은만이도 보살피기 어려운데, 중증 장애 아이들을 비롯해 많게는 19명의 아이를 직접 자기 집에서 키웠다.
그는 지난해 9월 미국 최대 생명보호단체인 라이브액션이 주는 올해의 생명상을 받았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어디서 태어났나.
▲ 1954년 9월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가지리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 평화로우신 분이었다. 자녀들한테 간섭을 안 하셨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분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마을 사람들한테 존경받았다. 아버지는 일본에 보국대로 끌려갔다가 돌아와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셨다. 좀 더 어릴 때는 우리 집안이 운영하는 서당에 다니셨다. 우리 집은 땅이 많은 편이었다. 머슴이 3명이었고 정미소도 운영했다.
-- 어머니는 어떤 분인가.
▲ 정이 많으셨다. 굶는 집에 보리쌀을 몰래 주시곤 했다. 당시에는 보리쌀도 귀했다. 나의 친구들이 풀뿌리를 삶아서 먹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아이가 아픈 집이 있으면 갈아서 먹이라고 쌀을 주시곤 했다. 어머니가 정이 많은 것은 할아버지의 영향인 듯하다. 마을에 시집온 여자분의 친정아버지가 찾아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분이 딸 집에 묵기가 여의찮으면 할아버지가 우리 집 사랑방에 모셨고, 음식 대접까지 하셨다. 우리 집에 3년 정도 머물렀던 분도 있었다.
[본인 제공]-- 어릴 때 독서를 많이 했나.
▲ 독서는 거의 못 했다.
-- 시골이어서 책이 없었기 때문인가.
▲ 독서에도, 공부에도 취미가 없었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 외에는 공부하지 않았다.
-- 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나.
▲ 나의 취미는 노래 부르는 것이었다. 노래 부르고 노는데 다른 아이들보다 신바람이 있었다. 나의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 부모님 농사일은 거들어줬나.
▲ 나는 일하지 않았다. 머슴이 3명이나 있었고, 농번기 때에는 마을 사람들이 도와줬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우리 논에서 모내기할 때도 나는 논에 들어가서 모를 심어본 적이 없다. 논두렁에 앉아 장구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모내기하는 사람들이 힘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못줄을 넘기면서 나의 장구와 노랫소리에 맞춰 합창했던 기억이 난다.
-- 중고교 시절을 어떻게 보냈나.
▲ 나는 집에서 4㎞ 떨어진 곳에 있는 대성중고등학교에 다녔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만뒀다. 당시 외삼촌이 고등학교의 교감이었고. 우리 집안 아저씨가 중학교 교감이었다. 6촌 형은 중학교 체육선생으로 학생지도부장이었다. 나는 학교에 가면 불량하다고 많이 혼났는데, 더는 참지 못하고 학교에 가지 않았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노는 데 집중했다. 싸움질도 했고, 입도 거칠었다.
[본인 제공]-- 집안 어른들이 보고만 있었나.
▲ 나는 마을에서 멍석말이를 당한 적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저놈은 구제 불능이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 되고, 만날 술만 먹고 놀기만 한다"면서 멍석으로 말아놓고는 지게 작대기로 때렸다. 아프지는 않았다. 흉내만 내는 정도의 구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체가 상당히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고교 학력은 나중에 직장 다니면서 검정고시로 취득했다.
-- 정미소에서도 일한 적이 있다고 하던데.
▲ 아버지가 콩나물공장, 학교 서무과 등에 취직을 시켰는데 나는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뒀다. 아버지는 할 수 없이 정미소에서 일하라고 하셨다. 어느 날 아버지가 순식간에 정미소 벨트에 옷이 끼어서 3∼4m 들어 올려졌다. 땅바닥에 강하게 떨어지면 아버지는 바로 돌아가실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나는 재빨리 발동기를 껐는데, 아버지의 갈비뼈와 다리뼈가 모두 부러졌다. 아버지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는지, 우리 형제들을 모아놓고 유언 같은 말씀을 하셨다. 다른 형제들한테는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하셨는데, 나한테는 정미소를 잘 운영하라고 하셨다. 그 후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회복하셨다.
[본인 제공]-- 서울로 올라온 계기는.
▲ 아버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나는 다시 이전의 자유분방한 생활로 되돌아갔다. 친구들과 3인조 밴드 또는 5인조 밴드를 만들어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열리는 음악 콩쿠르대회에 나갔다. 상도 받았고, 사회를 보기도 했다. 그러다 어떤 마을의 여성과 스캔들이 생겨 도주하다시피 서울로 왔다.
-- 상경해서 어떤 일을 했나.
▲ 서울에는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 노래로 먹고살기 힘들다고 판단해 부천 소사구 송내동의 유명 가방공장에 취직했다. 어느 날 회사 야유회 장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술을 잔뜩 마셨던 나는 버스 안을 뛰어다니며 옆 창문과 천장 형광등을 부쉈다. 버스 창문은 잘 안 깨지는데, 나는 순발력 있게 깨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나의 난동 때문에 야유회는 취소됐다.
-- 바로 해고됐나.
▲ 그렇다. 회사에서 쫓겨난 나는 성수동 원심분리기 제조 회사로 옮겼다. 이 회사에서 봄놀이를 간 적이 있었다. 사장이 "종락씨, 노래 좀 한다고 하는데 나와서 한 곡 해봐"라고 했고, 노래를 들은 사장은 나를 칭찬하면서 술을 따라줬다. 회사 이사들도, 부장들도 연이어 술잔을 건넸다. 20곡 정도를 불렀을 때쯤 나는 인사불성 상태로 취했다. 나는 결국 사고를 쳤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당신이 뭔데 자꾸 노래시키느냐"면서 사장에게 달려들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끌어내려 집단 구타를 했고, 그때 고막이 파손됐다. 갈비뼈 4개도 골절됐다. 나는 그 회사에서 해고됐다.
[본인 제공]-- 주량이 얼마나 되기에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나.
▲ 친구가 군대 갈 때 가장 많이 마신 것 같은데, 2ℓ짜리 큰 병 소주와 그보다 작은 소주 3병을 마셨던 기억이 있다. 나는 술을 잘못 배웠다. 어른들한테 술을 배워야 했는데, 불량스러운 친구들과 술을 먹다 보니 나쁜 버릇이 생긴 듯하다. 직장 다닐 때는 옆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나 혼자 남아있기도 했다. 나의 술주정을 우려해 집으로 가버린 것이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내가 한밤중에 술 먹고 우리 집 현관문을 찾지 못해 노래를 부르면서 집주변을 13바퀴 돌기도 했다고 한다.
-- 직장생활은 그것으로 끝났나.
▲ 나의 술주정이 소문나서 취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구류를 만드는 회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 회사에 이력서를 낸 지 한 달 만이었다. 아직 취업하지 않았으면 같이 일을 하자고 했다. 나는 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을 했기에 사장으로부터 인정받았다. 나는 어느 날 게으름을 피우는 후배 직원에게 훈계의 말을 하다 싸움이 나고 말았다. 나는 이 일로 해고될 줄 알았다. 나를 부른 사장은 예상과 달리, 교회에 다닐 것을 권했다.
[본인 제공]-- 교회에 다니면서 건전한 삶을 살았나.
▲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회개를 많이 했다. 서서히 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술과 담배도 끊었다. 오랫동안 술ㆍ담배에 파묻혀 살았는데, 그때부터 술 냄새만 맡아도 역겨웠고, 담배 연기가 있으면 머리가 아팠다.
-- 둘째인 은만씨도 본인 삶에 영향을 줬다고 하던데.
▲ 1987년에 은만이는 얼굴 크기의 혹을 얼굴에 달고 태어났다. 마치 얼굴이 두 개인 듯했다. 그 혹은 임파선염 때문에 생긴 것이었는데. 곧바로 악성으로 변했다. 태어난 지 4개월이 됐던 어느 날 아이의 열이 41.9도까지 올라갔다. 그때 시신경과 고막이 파손됐다. 구급차를 불러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으나 이미 호흡이 끊어진 상태였다. 의사들은 심폐소생술을 하다 포기하려 했으나 나는 울면서 다시 한번 시도해달라고 매달렸다. 기적적으로 아이는 다시 숨을 쉬게 됐다. 그러나 뇌세포가 죽어서 말을 할 수 없었다. 걸어 다닐 수도, 밥을 스스로 먹을 수도, 대소변을 가릴 수도 없었다. 은만이는 14년간 침대에 누운 채 병원 생활을 했다. 우리 부부와 첫째 지영이 등 가족은 아예 병원 침대 밑에서 생활했다. 은만이는 2019년 33세의 나이에 하늘나라로 갔다. 나는 은만이를 통해 아픈 사람, 힘든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본인 제공]-- 병원에서 기도 아저씨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고 하던데.
▲ 병원에 살다시피 하면서 아픈 아이들을 위한 기도를 많이 했다. 뇌암을 앓고 있는 초등학교 6학년생 남자아이가 있었다. 경기도 파주에서 온 아이였다. 나는 기도원에서 그 아이를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얼마 후 기적이 일어났다. 그 아이가 뇌 MRI 검사를 받았는데, 암이 사라진 것이었다. 보름 후에는 춘천에서 시각장애 아이가 병원에 왔다. 그 아이의 외할아버지는 나한테 기도를 부탁했다. 온 가족이 하나님을 믿어야 기도해줄 수 있다고 했더니 그분은 사돈의 8촌까지 모두 8명을 데리고 와서 기도에 참여했다.
-- 그 아이의 병은 나았나.
▲ 아이 가족들과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놀랍게도 그 아이의 시각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원래 그 아이는 시각장애를 고치려 한 것이 아니었다. 애당초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봤었다. 단지 눈의 통증을 해결하기 위해 병원에 왔는데, 시각이 살아난 것이다. 또 다른 기적이었다.
-- 그 이후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나.
▲ 이런 일이 일어나면서 은만이가 있던 5인실 병실에 사람들이 몰렸다. 저녁 8시 기도 시간에 50여 명이 오기도 했다. 병원 측은 기독교 병원도 아닌데 찬송가를 부르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했다. 나는 병원 측에 간곡히 부탁했고, 우리는 어린이병원 로비에서 예배를 볼 수 있게 됐다.
[본인 제공]-- 중증 장애 아이들 여러 명을 데리고 살게 된 계기는.
▲ 은만이가 입원했던 병원의 옆 병실에 상희라는 아이가 있었다. 전신 마비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이였다. 어느 날 그 아이의 외할머니가 나를 보자고 했다. 83세의 그 할머니는 사흘간 나를 유심히 살펴봤다면서 자기 손녀딸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자기는 멀지 않아 세상을 뜰 것 같다고 했다. 아이의 엄마와 언니는 정신 지체자였고, 아이 아빠는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아이를 맡아주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했다. 열심히 전도하는 내가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었다.
-- 상희를 키우는데 아내도 동의했나.
▲ 나는 그 할머니에게는 수락한다고 말했지만 아내한테는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은만이 한 명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내는 연약한 몸으로 분식집을 운영하면서 오토바이 배달까지 하고 있었다. 고민하던 나는 상희가 우리 집에 오기 1주일 전에서야 용기를 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서 아내한테 상희 이야기를 했다. 그 순간 아내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쳐다봤다. 날벼락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하나님이 하라고 그랬으면 해야죠" 아내의 말이었다.
[본인 제공]-- 상희를 시작으로 그 후에 4명의 아이를 또 데려오지 않았나.
▲ 진료를 위해 상희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의사는 아이가 많이 회복된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상희가 우리 집으로 올 때는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우리와 함께 병원에 진료받으러 갔을 때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목도 가눌 수 있었다. 그 의사는 진료 후 우리 부부를 잠깐 보자고 했다. 4명의 아기가 병원에 2년6개월∼3년간 방치돼 있으니 맡아달라고 했다. 부모들은 돈 벌러 간다고 나간 후에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당황스러워서 답변을 못 했다.
-- 4명의 아이는 데려오지 않기로 했나.
▲ 아니다. 동행했던 아내가 의사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동의 표시를 했다. 나는 아내한테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아이가 보호자 없이 방치돼 있다고 하잖아요?"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은만이를 포함해 모두 6명의 아이를 우리 집에서 키우게 됐다. 우리 집 식구는 계속 늘어나 19명이 함께 생활한 적도 있다. 지금은 장애가 있어 누워있는 4명의 아이를 포함해 10명의 아이가 서울 금천구 시흥동 자택에서 살고 있다.
[본인 제공]-- 베이비박스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 우리 집 주변에 아이를 놓고 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내가 장애 아이를 정성껏 돌본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대문 앞, 주차장, 공중전화부스, 공원 입구 등 우리 집 근처 여기저기에서 아기가 발견됐다. 2007년 4월 새벽 3시쯤 우리 집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가 전화를 받았는데 상대방 남자는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우리는 곧바로 문밖으로 달려갔다. 계단 아래에 박스가 있었고, 고양이가 그곳에서 후다닥 달아났다. 박스에서는 굴비 냄새가 많이 났다.
-- 박스 안에 아기가 있었나.
▲ 아이가 시퍼렇게 식은 상태로 누워 있었다. 갓 세상에 나온 강아지 새끼처럼 가슴만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우리가 조금만 늦었다면 고양이로부터 아기가 피해를 볼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는 아기를 안고 들어와 산소호흡기로 산소를 공급하고, 주사기를 이용해 한 방울씩 우유를 먹였다. 그 아기에는 온유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여자 아기였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베이비박스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갖게 됐나.
▲ 나는 이런 일을 겪으면서 뭔가 조치를 하지 않으면 죽는 아기가 생길 수 있다는 걱정이 들었다. 어느 날 국민일보 외신기사를 통해 체코의 베이비박스 소식을 접하게 됐다. 그 나라 관련 기관에 메일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으나 답변이 없었다. 나는 철공 일을 하는 친구 집사한테 부탁해 베이비박스를 설치하게 됐다.
-- 아이를 맡긴 사람들의 사연 중 기억에 남는 것은.
▲ 여중학교 2학년생이 제주도에서 왔다. 그 아이는 음란물을 본 남자친구가 "우리도 한번 해보자"고 해서 결국 임신하게 됐다고 한다. 아이는 산달에 이르러 엄마와 아빠가 출근하고 없는 시간에 혼자 집에서 출산했다. 남자친구는 임신 소식을 듣고는 이미 달아난 상태였다. 아기 울음소리가 나자 옆집 아주머니가 와서는 아이 낳은 흔적을 치워줬다. 아주머니는 부모에게 알리지 않겠다고 산모에게 약속했고, 어린 산모가 서울 베이비박스로 가겠다고 하자 제주 부두까지 승용차로 태워줬다. 여객선 안에서 아기는 배고파 울었다. 이를 본 어떤 아기 엄마가 젖을 먹여줬다. 그 중학생 산모는 인천에 도착한 뒤 서울의 이곳까지 왔는데, 모두 16시간 걸렸다. 나는 "엄마가 아기를 살렸다"면서 여기까지 온 것을 칭찬해줬다. 그 여중생은 펑펑 울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공중화장실에서도 아기를 낳는 일이 있나.
▲ 어떤 미혼모는 아기를 공중화장실에서 몰래 낳고는 변기에 아기를 빠트린 뒤 물을 내렸다. 아기가 내려가지 않고 크게 울자 정신이 번쩍 들은 미혼모는 아기를 탯줄째 교복에 싸서 이곳에 찾아왔다.
-- 아기가 변기로 내려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 그 정도로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이런 산모들은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다. 조현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미혼모도 있다.
-- 산에서 몰래 아이를 낳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왜 산으로 가나.
▲ 아기를 낳자마자 산에 묻을 생각으로 산에 간다. 한 여학생은 수업 중에 진통이 왔다. 화장실에 간다고 교실에서 빠져나온 그 여학생은 인근 산으로 올라갔다. 물이 흘러서 움푹 파진 곳에 아기를 묻기로 하고 그 주변을 정리해 놓은 뒤에 어렵게 아기를 낳았다. 아이를 묻으려는 순간 갑자기 아기가 울었다. 양수가 입으로 들어가 울지 못하던 아기가 캑캑하면서 울기 시작한 것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학교까지 들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아이의 울음소리는 컸다. 아기 엄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에는 여전히 하혈이 있는 상태에서 교복으로 아기를 싸안고 이곳에 달려왔다.
-- 복대를 해도 만삭이 되면 표시가 날 텐데.
▲ 나이가 어린 사람이 갖는 아기의 몸집은 작은 편이어서 사람들이 임신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 몸에 살을 찌워서 임신 사실을 은폐하기도 한다. 아기를 가지면 엉덩이가 뒤로 나오는 자세가 되는데, 일부러 이런 모습을 숨기려 애쓰는 소녀도 있다.
-- 병원에서도 아이 낳는 게 힘든데, 어떻게 혼자 아이를 낳나.
▲ 애 낳는 것은 죽기를 각오하는 일이다. 산모가 출산하다 호흡곤란으로 죽는 경우도 있다. 몰래 아이를 낳는 엄마는 이를 악물고, 아파도 소리도 못 지른다. 그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본인 제공]-- 아기 엄마가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하나.
▲ 어떤 미혼모는 고시원에서 아기를 낳았다. 3층에서 아기를 던지고, 자신은 5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할 계획까지 구체적으로 세웠다. 자기는 3층보다는 5층에서 투신해야 사망에 이를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 계획을 결행하려는 순간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마침 TV에서 베이비박스에 관한 보도가 나왔는데, 이를 본 친구가 아기를 베이비박스에 데려가면 보호해준다고 알려줬다. 그 아기와 산모는 그렇게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 아기들이 죽을 수 있는 상황이 많은가.
▲ 어떤 20대 남자는 여수에서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아기를 낳았다. 엄마는 아기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가출했다. 일가친척이 전혀 없는 그 아빠는 혼자 아기를 키울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트럭을 빌려서는 아기를 태우고 서울 베이비박스로 오다가 휴게실에서 잠깐 쉬었다. 그때 굳이 베이비박스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빠는 아기를 포대기로 싸서 휴게소 뒷산에 놓고 내려왔다. 추운 겨울날이었다.
-- 아기가 숨졌나.
▲ 산에서 내려와 트럭의 시동을 끄고 주유 중이던 그에게 아기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는 듯했지만, 그 아빠에게는 아기 울음소리가 뚜렷했다. 다시 산에 올라간 아빠는 울면서 발버둥 치는 아기를 보고는 마음을 바꿨다. 그는 아기를 이곳 베이비박스에 데려왔다. 아기 엄마는 3개월 후에 집으로 되돌아왔고. 그 아빠는 아기를 다시 데려갔다. 아빠는 아기를 찾을 기회를 줘서 고맙다면서 많이 울고 갔다.
-- 아기가 상처를 입은 상태로 오는 경우도 있나.
▲ 어떤 아기는 목에 시퍼런 멍이 든 상태에서 온다. 한 미혼모는 친구 자취방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가 너무 큰 소리로 울자 자기도 모르게 아기의 목을 조였다고 했다. 자칫하면 아기가 죽을 뻔했다.
[촬영 이건희]-- 베이비박스가 합법적 시설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죽어가는 아이를 보호하고 살리는 일이 왜 불법인가? 생명을 살리는데 합법, 불법을 따지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최근 조사에서 드러났듯이 이곳에 오지 못한 아이들은 파묻히고, 살해당하고, 유기되고, 불법 인신매매단에 의해 팔려 간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하면 빨리 119로 신고하는 것이 당연하다. 불난 것을 보고 구경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먼저 보는 사람이 신고해야 한다.
-- 아기를 낳은 위기 산모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는.
▲ 지금도 임신 상태에서 두려움에 떠는 엄마들이 있다. 걱정하지 말고 이곳에 왔으면 한다. 베이비박스는 여러분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엄마도 살고, 아기도 살아야 한다. 여기에 와서 상담도 하고, 위로도 받고, 치료도 받았으면 좋겠다.
keunyou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