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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우리가 필요하다면…" 설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Writer. 주사랑공동체   /   Data. 2023-01-21   /   Hit. 1977
설 연휴 포기한 채 나눔·봉사 실천해
베이비박스 상담사·거리상담 복지사
명절 배고픔은 무료급식이 책임져
19일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 위기영아 긴급보호센터 이혜석 선임상담사가 한국일보와 인터뷰하며 밝게 웃고 있다. 그가 서 있는 곳이 아기를 맡기려는 엄마들과 상담을 진행하는 베이비룸이다. 최주연 기자


2년 전 설날 새벽이었다. 동이 막 틀 무렵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 위기영아 긴급보호센터(베이비박스)’ 스피커가 ‘띵동~’ 하고 울렸다. 누군가 베이비박스 문을 열었다는 신호였다. 당직을 서던 이혜석(59) 선임상담사는 급히 뛰쳐나갔다. 문 앞엔 앳된 얼굴의 20대 여성이 서 있었다. 그는 피에 흠뻑 젖은 옷을 입은 채 두꺼운 외투로 감싼 아기를 안고 있었다. 여성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안심부터 시켜야 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니 조금 안정을 찾은 듯했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머니, 힘들겠지만 용기를 내보는 게 어때요? 도와줄 사람이 많답니다.”

 

"도움 필요한 엄마, 365일·24시간 기다려요"

19일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 위기영아 긴급보호센터에서 이혜석 선임상담사가 베이비박스를 열어 보고 있다. 최주연 기자


3년 만에 찾아온 대면 설 연휴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에 들뜬 이들이 많다. 하지만 올해 설에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명절에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기 위해, 또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기꺼이 휴식을 반납했다.

베이비박스의 문은 365일 열려 있어야 한다. 이 선임상담사는 20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엄마들이 요일이나 시간을 정해놓고 오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상담사들도 24시간 상주한다. 단순히 아이를 받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다. 엄마가 베이비박스 손잡이를 열고 아기를 내려놓는 짧은 순간이 센터 입장에선 ‘골든타임’이다. 산모를 설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여서다. 이 선임상담사는 “출산 전 냉정하던 엄마들이 막상 아기를 낳고 나면 마음이 많이 흔들린다고 말한다”며 “이때 위로와 도움을 통해 아기의 가정 복귀를 돕는 게 우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엄마와 아기 맞을 준비를 하며 휴일을 포기한 지 햇수로 벌써 5년이다. 생활의 일부를 버리는 삶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지만, 이 직업에는 형언할 수 없는 ‘끌림’이 있다. 그는 “조그만 손발가락 스무 개를 꼬물거리는 아기들이 계속 일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라고 미소 지었다.

 

"설 한파에도 새벽까지 거리의 안부 물어요"

18일 서울 영등포구 응급쪽방에서 박강수 보현희망지원센터 희망지원팀장이 새벽 거리 상담의 고충을 털어놓고 있다. 최주연 기자


서울 영등포보현노숙인희망지원센터 소속 4년 차 사회복지사 박강수(49) 희망지원팀장은 매년 설 연휴에 칼바람을 맞는 일이 익숙하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노숙인들을 만나는 ‘거리상담(아웃리치)’ 활동이 그의 업무다. 그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응급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임시 거소ㆍ급식 등이 제공되는 노숙인종합지원센터로 연결해 준다. 박 팀장은 “노숙인 대다수가 일정한 주거 없이 길에서 생활하고, 사회복지망 안으로 잘 들어오려고 하지 않아 힘든 점이 많다”고 털어놨다.

18일 서울 영등포구 응급쪽방에서 박강수 보현희망지원센터 희망지원팀장이 달력을 가리키며 설 연휴 근무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그래도 거리상담은 하루도 빼먹지 말아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특히 설이 끼어 있는 겨울엔 노숙인들이 건강상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아 더 긴장한다. 때론 아무리 추워도 야외취침을 고수하는 노숙인들을 설득해 ‘응급구호방(7~10명 수용)’이나 ‘응급쪽방’으로 데려오기도 한다. 기온이 확 떨어지는 밤 7시부터 새벽 5시 사이가 취약 시간대다. 그는 “건강 상태와 필요한 생필품, 생활 불편 등을 묻는 거리상담 활동마저 없다면 노숙인들은 사회와 완전히 단절될 것”이라며 “남들처럼 못 쉬는 건 힘들지만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산다”고 말했다.

 

"배고픔이 가장 큰 고통... 매일 밥 퍼요"

18일 서울 영등포구 쪽방촌 인근 무료 급식소 토마스의 집에서 박경옥 총무가 배식 도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배고픔이 명절이라고 건너 뛸 리 없다. 가난하고 곤궁한 이들의 소중한 한 끼를 책임지는 ‘급식봉사’가 연휴에 문을 닫을 수 없는 이유다. 서울 영등포 쪽방촌 옆 대로변에 있는 무료급식소 ‘토마스의 집’은 이번 설 연휴 때 정기 휴일인 일요일(1월 22일)을 제외하고 3일간 정상 운영한다. 외려 설이나 추석 땐 평소보다 100~150명 많은 사람이 찾는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 외롭고 지친 이웃이 생각보다 많다는 의미다. 박경옥(64) 토마스의 집 총무는 28년째 단체 살림을 책임지고 있다. 조리 준비부터 최종 배식까지 전 단계를 총괄하는, 급식봉사계 ‘마에스트로(거장)’다.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탓에 명절은 당연히 언감생심이다. 박 총무는 “언제 추석, 설을 챙겼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며 웃었다.

18일 서울 영등포구 쪽방촌 인근 무료 급식소 토마스의 집에서 박경옥 총무가 배식을 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명절까지 이어지는 고된 일상에 지쳐 ‘꾀’를 부리고 싶은 적도 많다. 그 때마다 며느리의 급식봉사를 자랑스러워하던 시아버지의 말을 떠올린다.

“인간의 가장 심한 고통이 배고픔이다. 우리 며느리가 외로운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일을 하니 참 고맙다.”

칭찬의 몫은 여럿이 나눠야 한다. 수많은 자원봉사자의 노력이 지금껏 토마스의 집을 지킨 힘이다. 이번 설에도 자원봉사자 30여 명이 배식 도우미로 나선다. 박 총무는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분들이냐”며 “덕분에 ‘우리 님’들에게 따뜻한 떡국 한 그릇 대접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우리 님은 박 총무가 토마스의 집을 찾는 이들을 부르는 애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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